본문 바로가기
방통대-국어국문학과 /고전소설(한문학)

한국한문학의 역사적 전개 (나말여초부터 여말선초까지 한문산문 작품정리)

by 오책방 2021. 9. 24.
반응형

우리민족의 문학사에 대해서


우리민족의 문학사의 기록 초기에는 중국의 문화와 한자표기에 큰 영향을 받았다. 동아시아의 중심엔 세계 4대 문명의 시작된 중국이 있다. 황하유역에서 문명이 발생하여 발전을 이루었고, 한자라는 문자가 주변국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리하여 각 나라마다 고유의 문자가 생성된 시기가 늦어지게 되었다. 부족이 큰 국가를 형성하게 되고 역사나 문화를 기록할 필요성을 점차 느끼게 되지만, 독자적인 문자가 없어 한자를 대체 기록수단으로 사용하게 된다. 우리말과 고유 정서를 담아내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그 속에서도 다양한 한문 구사를 이용하여 우리의 정서가 담긴 아름다운 한문학을 남겼다.

기록문학이 시작되는 4세기부터 6세기 사국시대와 삼국시대, 특히 통일신라시대를 살펴보면 중국의 한문학양식을 그대로 쓰인 것이 아니라 표기수단을 빌려 우리 표현 식으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후대의 한문학과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국문학의 성격이 어떤 시대적 과정을 거쳐 발전하게 되었는지 그 이해를 돕기 위해 한국한문학의 역사적 전개의 한 맥락을 짚어내어 그 대표 문인과 한문산문 작품을 찾아 정리하고 본인의 감상을 서술하였다.

 

한국한문학의 역사적 전개


7세기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힘의 균형이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두 나라를 멸망시키고, 남쪽 아래 영토를 넓혔다. 고구려 유민이 세운 북쪽과 연해주 중심의 만주 동쪽지역은 발해가 세워졌다. 이 시기를 남북국시대라 한다. 신라는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당의 정치제도를 수용한다. 그 방편으로 지배층의 자제를 유학생으로 파견하는 것이었다. 9세기에 이르러 당나라는 문호를 개방하고 외국인에게도 과거시험을 치르게 하는 빈공과를 개설하여 신라 6두품 중심의 개인 유학생들이 대거 유입된다.

신라에는 한자의 훈과 음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수단으로 향찰이 등장한다. 우리말을 어순에 맞게 표기하고, 한자의 뜻과 소리를 빌려 완벽히 기록한다. 이때 한문문학도 발달하고 향찰문학과 한문학이 공존하며 발전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초기는 문신이 권력의 중심을 이룬 귀족사회였으나 과거제도를 시행한 고려 중후반 이후로 숭유정책을 펼치면 문반 중심의 귀족체제가 형성되었다. 과거제도 지공거 출신의 시험관들이 사학에 힘써 경전 이해보다 시문의 창작을 중시해 국학이 쇠퇴했다. 시문학을 중심으로 한문학이 발전하였고 당풍의 작시 유행하며 한시 수준을 높였다.

고려 말에는 무신란과 원의 간섭으로 고려는 쇠의 길을 걷고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삼는 신진사대부 집단이 등장한다. 이들은 한시, 가전, 경기체가, 업가 같은 다양한 형태의 한문학과 시가문학을 발전시켜나갔다. 다음은 나말여초부터 여말선초까지 문단을 주도한 대표적 문인과 작품을 정리하고 그중 한 문인의 산문작품 하나를 선정하여 본인의 감상을 서술하였다.

 

나말여초부터 여말선초까지 한문산문 작품정리

 

(1) 신라말의 6두품 대표 문인과 그 작품

7세기에서 8세기 신라의 본격적인 문화융성기를 걸쳐 성숙기에 이른다. 8세기 중후반 왕권이 불안정해지고 정쟁이 치열해 지며 내리막길을 걷게 되어 유학의 길에 오른 6두품 출신의 이들에게도 불운을 드리우게 된다. 이 시기 가장 두각을 띈 문인은 최치원이다. 그의 작품으로는 『계원필경』,『중산복궤집』있다. 그를 최초의 산문작가로 보아도 손색이 없다. 그밖에도 두각을 띈 산문문인으로 최승우, 최언위 등이 있다. 다음은 최치원,『계원필경』,권11,「격황소서」의 한 대목이다. 당나라 말엽의 반란을 주도한 황소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내용으로 변려문의 정수로 꼽히고 있다. 한편으론 최치원의 힘세고 굳건한 문장을 느낄 수 있고 나라를 위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동안 우리 국가는 덕이 깊어 더러움을 포용했고, 큰 은혜를 베풀어 결점을 눈감아 주고 네게 부절을 주어 지방을 맡겼다. 너는 되레 짐새의 독을 품고 올빼미 소리를 거두지 않았다. 걸펏하면 사람을 물어뜯고 곳곳에서 주인에게 짖어만 댔다. 끝내 임금의 은혜를 배반하고 군대로 궁궐을 에워싸서 (중략) 너는 국가에게 은혜를 저버리는 죄를 짓고 있다. 네가 죽을 날이 분명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어찌하여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2) 고려 중기의 고문가 대표 문인과 그 작품

고려시대 산문의 근간을 이루는 문체는 사륙변려문이다. 과거 중국 육조시대 유미적 형식주의를 우려하며 비판하고 반발한다. 11세기말 12세기 초 고려 중기에 이르러 고문운동이 일어난다. 고문이란, 문체 개념으로 산문 체제를 유지한 문체를 말한다. 산문체의 고문을 사용한 대표적 문인으로 김황원과 김부식이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열전의 수많은 작품은 고문체의 문학성 풍부한 문장으로 평가 받는다. 정지상 한시로 높이 평가 받았으며 고문체에 능한 문장가였다. 그밖에도 박인량, 김황원, 최충 등이 있다. 고려 중기 정교한 대구나 화려한 문장에 반발하여 더욱 상고시대 고문으로 작품을 짓기 시작한다. 더욱 간결하고 소박한 문체를 써 유가적 의식이 담긴 작품을 남긴다. 다음은 김부식의『삼국사기』권45,「온달전」의 한 대목이다. 유가적 도의를 보여 주제의식 또렷하고 국가를 위하여 희생하는 의미가 담겼다.

 

온달이 출병에 임박하여 맹세하였다. “계립현과 죽령의 서쪽이 나에게 귀속되지 않는다면 돌아오지 않으리라.” 마침내 가서 신라군과 아단성 아래에서 싸우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길에서 죽었다. 장례를 치르려는데 널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삶과 죽음은 결정되었습니다. 아! 돌아가십시다.” 드디어 관을 들어 장사를 지냈다. 대왕이 이를 듣고 비통해하였다.

 

 

 

김부식의 『 삼국사기 』

 

 

 

(3) 고려 말의 신진사대부 대표 문인과 그 작품

고려 말 과거를 통해 중앙에 진출한 신흥사대부 출신들은 성리학 이념을 정치와 문학에 구현하려 힘썼다. 그 대표 문인으로는 이규보, 이제현, 이인로, 최자 등이 있다. 원 간섭기 아래 그들 문사들과 교류하며 성리학을 도입하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사물에 대한 독특한 문학 형식을 둔 가전체 산문은 독특한 문체와 개성을 보인다.고려말 대표 문인들의 산문작품으로 이규보의「경설」,「주뢰설」,「슬견설」,「괴토실설」,「이옥석」,「뇌설」,「논시설」,「칠현설」,「천인상승설」, 이제현의『역옹패설』, 이인로의 『파한집』, 최자의 『보한집』이 있다. 또 가전체의 작품으로는 이곡의「죽부인전」, 임춘의「국순전」,「공방전」, 이규보의「국선생전」,「청강사자현부전」, 혜심의「죽존자전」,「빙도자전」이 있다. 다음은 이규보의『동국이상국전집』권21,「주뢰설」의 한 대목이다. 사회부조리와 인간의 본질을 담아 철학적이다.

두 배의 크기도 같고 사공의 수도 같으며, 배에 탄 사람과 말의 수도 거의 비슷하였다. 그런데 조금 후에 보니, 그 배는 나는 듯이 달려 벌써 저쪽 언덕에 닿았지만, 내가 탄 배는 여전히 멈칫하며 나가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배안에 있는 사람이 “저 배는 사공에게 술을 먹여서 사공이 힘을 다하여 노를 저었기 때문이오”라 하였다.

 

(4) 조선초기의 관각파․사림파․방외인 대표 문인과 그 작품

성리학맥은 조선 전기 산문으로 잇고 있다. 그래서 원나라의 간섭에서 명나라로 교체됨에도 친명정책을 펼쳐 고려왕조의 명맥을 이으려고 하는 문인들이라 할 수 있다. 그 대표문인으로 고려 문인 이곡의 아들 이색이 있다. 고려에서 조선까지 학풍과 문풍 계승시키며, 고문 창작을 한다. 조선 초 왕조를 바꾸고자 한 급진파와 왕조만을 유지하자는 온건파가 대립한다. 급진파인 정도전은 『조선경국대전』을 지어 통치 질서를 확립하고, 집현전 중심으로 발달시켜나간다. 국내외 공식문서를 전담 문인들이 주도하는 관각문학으로 훈구문신들이 전성기를 맞는다. 이들 관각파의 적통은 성현으로 『용재총화』에 문학의 독자성과 다양성을 강조하여 잘 드러난다.관각파와 문학인식을 두고 대립하고 사림파의 대표 문인은 김종직이다. 그는 문학가로서 문학이 도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며,『동문수』를 편찬하였다. 관각파와 사림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유교이념을 신봉하는 방외인이 한 파를 이루고 있다. 그 대표 문인으로는 김시습, 남효온 등이 있다. 그 대표 저서로는 김시습의『금오신화』가 있다.

 

 

임춘의「국순전」한문산문 작품에 대하여


고려 중, 후기에 등장한 가전체는 독득한 문체와 개성을 살린 산문을 가리킨다. 현전하는 작품 중 임춘의 「국순전」은 술을 의인화한 작품이다. 간사한 벼슬아치에 대한 풍자적, 교훈적인 성격이 담겨져 있다. 술을 탐닉할수록 인간은 타락할 수 있음을 경계하고자 한다. 한편 이 작품에서는 타락한 왕과 벼슬아치들을 고발하고 정사를 그르치게 한 간신배들을 비판하며, 능력 있는 인재를 관직에 등용시키지 못하고 소인배들이 득세하는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

중국의 설화를 꾸며낸 것이 고려 가전체의 특징인데 지방 향리 출신들이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고사를 끌어와 쓰는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고려 후기 신진사대부들의 실무능력과 문학적 소양이 합쳐진 취향으로 보여 진다. 신진사대부들은 무신의 난으로 인해 약화된 세력 속에 불편한 심기를 가전체를 통해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문학적 역량을 과시하려 했다. 실제 「국순전」의 작가 임춘은 고려 건국 공신의 자손이었으나 무신의 난이 일어나 삶이 전과 다르게 피폐해져 벼슬의 기회도 없이 타향살이하며 힘겹게 지낸다. 작가의 부정적인 인식과 세상 비판 의식이「국순전」을 통해 창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국순전」은 ‘국순’이라는 가공인물을 주인공 삼아 그의 일대기를 서술하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국순 개인 가계와 성품, 정계에 진출, 임금의 총애, 국순의 전횡과 은퇴와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애에 대해 비추고 있다. 시작은 국순의 재간에 모두가 흠모하여 되나, 벼슬에 올라 임금의 마음 어지럽히고 돈을 밝혀 비탄 받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끝난다. 「국순전」의 교훈은 술에 대한 애증이 결과론적으로 타락하여 패망에 이르게 함을 잊지 말고 신하된 자 분수에 맞게 절제하며 왕의 신임에 필요한 인재가 되어야 함이 옳은데 그렇지 못할 경우 비난의 대상이 되고 징계할 것을 말하며 술의 의인화하여 교훈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다음은 임춘의「국순전」에서 국순의 전횡과 은퇴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한 대목이다.

 

순(醇)이 권세를 얻고 일을 맡게 되자, 어진이와 사귀고 손님을 접함이며, 늙은이를 봉양하여 술ㆍ고기를 줌이며, 귀신에게 고사하고 종묘에 제사함을 모두 순(醇)이 주장하였다. 위에서 일찍 밤에 잔치할 때도 오직 그와 궁인(宮人)만이 모실 수 있었고, 아무리 근신이라도 참예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위에서 곤드레 만드레 취하여 정사를 폐하고, 순은 이에 제 입을 자갈물려 말을 하지 못하므로 예법(禮法)의 선비들은 그를 미워함이 원수 같았으나, 위에서 매양 그를 보호하였다. 순은 또 돈을 거둬들여 재산 모으기를 좋아하니, 시론(時論)이 그를 더럽다 하였다. 위에서 묻기를, “경은 무슨 버릇이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옛날에 두예(杜預)는 《좌전(左傳)》의 벽(癖)이 있었고, 왕제(王濟)는 말[馬]의 벽이 있었고, 신은 돈 벽이 있나이다.” 하니, 위에서 크게 웃고 사랑함이 더욱 깊었다. 일찍이 임금님 앞에 주대(奏對)할 때, 순이 본래 입에 냄새가 있으므로 위에서 싫어하여 말하기를, “경이 나이 늙어 기운이 말라 나의 씀을 감당치 못하는가.” 하였다. 순이 드디어 관(冠)을 벗고 사죄하기를, “신이 작(爵)을 받고 사양하지 않으면 마침내 망신할 염려가 있사오니, 제발 신을 사제(私第)에 돌려주시면 신은 족히 그 분수를 알겠나이다.” 하였다. 위에서 좌우에게 명하여 부축하여 나왔더니, 집에 돌아와 갑자기 병들어 하루 저녁에 죽었다.

 

한문학에 담긴 우리 고유의 정서 연구의 필요성


소설의 모태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비록 우리의 문화를 기록할 수단으로 한자를 빌려와 썼으나 우리 고유의 정신과 사상은 퇴색되지 않고 거듭 발전하였음을 알았다.국가의 흥망성쇠 아래 기록의 필요성이 커지고 외교를 통해 선진국의 문물 받아들이고 내 것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지속되어 왔다. 고대에서 구전으로 전해진 이야기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이야기 속에 일부라도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소실되지 않고 남김이 전해졌다면 좋았겠지만 상상 너머 우리가 이어갈 부분이라 생각한다. 이것만으로도 우리 문학사에 크나큰 기쁨이지 않을까. 한문학을 되짚어 볼 필요성은 충분하다.

신라 말의 6두품, 고려 중기의 고문가, 고려 말의 신진사대부, 조선전기의 관각파, 사림파, 방외인 등 나말여초부터 여말선초까지 각 시대별 문단을 주도한 문인과 그 주요 한문산문 작품을 두루 보았으며 감상 후 과제물을 정리하였다. 시대의 과오 속에 최치원에서 김시습까지 잊지 못할 한 문인을 만났고 대한민국의 근대 이전의 한문학에서 이전에 미처 알지 못한 우리의 고전의 깊이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다른 외국소설에 전혀 뒤처지지 않으며, 한시는 고혹적이고, 한문학은 우리만의 정서가 녹아내려져 있다. 시대는 지났으나 우리 것을 더욱 풍요롭게 취할 방법이 무엇일지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러한 한문학을 더욱 가까이 접하고 한 문인을 선택하게 깊이 있게 문체를 탐구하고 작가의 사상을 연구한다면 더 의미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손종흠, 안대회, 한국한문학의 이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0년

-.임춘, 국순전, 고전번역서, 동문선 제100권, 전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