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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통대-국어국문학과 /국문학(근대문학)

근대문학 이효석 작가 생애와 작품 알아보기

by 오책방 2023.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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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생애와 작품

 

이효석 작가

한국문학 단편 수작으로 손꼽히는 메밀꽃 필무렵으로 유명한 일제 강점기 작가이자 대학교수. 호는 가산(可山)이며, 필명은 아세아(亞細兒), 문성(文星) 등을 사용했다.

작품 경향은 초기 동반자 작가로 불리며 사회주의적 경향문학의 띄다가 후기로 가면서 색채가 바뀌어 순수 문학의 길을 걸었고, 향토색이 짙은 작품을 다수 발표했다. 사실 향토색 짙은 작품만 쓴 것은 아니고, 모던보이나 근대 문화를 기반으로 한 작품도 있으며, 성(性)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새로운 작품경향으로 주목을 끌기도 했는데, 현대 대한민국의 국민공통교육과정 의무교육에서 다루어지는 메밀꽃 필 무렵의 그늘이 너무 강하기 때문인지 이효석은 향토적인 작품을 쓴 작가라는 이미지가 크게 강조되는 편이다. 그의 문체는 세련된 언어, 풍부한 어휘, 시적인 분위기로 요약할 수 있으며, 시적인 정서로 소설(산문문학)의 예술성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생애

어린 시절

1907년 2월 23일,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에서 한성사범대학교 출신으로 교직에 있었던 부친 전주 이씨 안원대군파 이시후(李始厚)와 성결교단 집사였던 모친 곡산 강씨 강홍경(康洪卿) 사이에서 1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학자였던 부친의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한 이효석은 1914년 4월 평창의 군청 소재지에 있는 평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고 하숙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숙집에서 본가에 다녀올 때면 100리가 넘는 거리를 오가게 되었는데, 이는 훗날 그의 대표작인 "메밀꽃 필 무렵"에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고 물놀이와 고기잡이 꽃놀이를 즐긴 경험, 그리고 특히 '오대산에서 내려오는 목기류 행상, 심마니의 모습, 머루와 다래 같은 산과, 꿀 뜨기, 농산물 품평회' 등을 본 기억은 그의 작품의 바탕이 될 정도로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보통학교 6년 과정을 수석으로 마치고 1920년 3월 평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동년 4월 당시 조선 최고의 고등보통학교였던 경성제일고등학교에 입학해 이후 평생을 절친한 벗으로 지내게 되는 1년 선배 현민 유진오 선생과 만나게 되었다. 고등보통학교 시절부터 서로 평을 교환하며 서구문학을 섭렵했고, 유진오는 시를, 이효석 본인은 소설을 써서 서로 돌려 읽고 비평하며 우정을 다졌다고 한다.

등단한 후 없는 살림에도 이효석이 잡지에 글을 써서 받은 고료로 술을 마신 사람도 유진오였고, 이효석이 임종하기 직전 보고 싶다고 했던 사람도 친우인 유진오였다고 한다. 이효석은 경성제일고보 역시 우등으로 졸업하고, 1924년 제1회 입학생 수석 유진오의 뒤를 따라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1925년 제2회 신입생으로 입학한다.

 

이효석

 

대학 시절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재학시절

이효석은 경성제국대학 예과 1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1925년 12월 예과생도회에서 간행하는 <清凉>[2] 제2호(1925.12)에 아일랜드 문예부흥을 주도한 예이츠가 아일랜드 전통적 세계를 몽환적으로 다룬 시 The Stolen Child를 일본어로 번역한 窃まれた兒를 게재한 것을 시작으로 제3호(1926.3)에 冬の市場, 제4호(1927.1)에 六月の朝外五篇를 싣는 등 예과 생도 시절부터 활발히 문예 활동에 참여했다.

1927년 3월 예과를 수료하고 이어 법문학부로 진학한 이효석은 당초 예과에서 문과A반이었기 때문에 법학과로 진입하게 되어있었으나, 문과B반 동기들과 함께 문과로 올라가 문학과로 진입하였다. 전공으로 사토 기요시 교수의 영문학을 택한 그는 학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8년 잡지 <조선지광>에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3] 1929년 학위논문으로 예이츠에게서 영향을 받은 아일랜드의 극작가 존 밀링턴 싱(John M. Synge)의 희곡을 분석한 <The Plays of John Millington Synge>를 제출했으며, 1930년 3월 문학사 칭호를 수여받고 학부를 졸업하면서 법문학부 조선인 학생들이 발간하는 <新興>(1930.4)에 키플링이 인도를 배경으로 쓴 작품인 Venus Annodomini[4]를 번역해 게재했다. 이렇게 대학 시절 이효석은 영국의 식민지인 아일랜드와 인도에 관심을 나타내며, 식민지의 삶에 천착했다.[5]

 

순수 문학으로

1930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한 이효석은 1931년 7월,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성동본인 나남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의 이경원과 결혼한다. 그러나 1929년 촉발된 대공황과 뒤이어 닥친 불황의 여파속에 작품 활동을 계속 하던 이효석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은사인 쿠사부카 소지(草深常治)[6]의 추천으로 1931년 하반기 또는 1932년 초에 조선총독부 경무국 검열계 서기로 취업하기도 했는데, 양심의 가책과 세간의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불과 보름 만에 사직하고 말았다. 

화려한 도시 경성부에서의 비참한 도시 빈민의 모습을 그린 대학 시절의 등단작 <도시와 유령>, 그리고 소련을 그리며 가고자 하는 <노령근해>, <상륙>, <북국사신> 등으로 대표되는 경향문학 등 활동 초기 이효석은 동반자 작가로 분류될 만큼 사회주의 경향이 짙은 작품들을 썼다. 그러나 1932년, 처가가 있는 함경북도 경성군으로 가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로 취직해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되기 시작한 뒤로 그의 작품세계는 초기의 경향문학적 요소를 탈피하고 그의 진면목이라고 할 수 있는 순수문학을 추구하게 된다. 그리하여 향토적·이국적·성적 모티프를 중심으로 한 특이한 작품세계를 시적 문체로 승화시킨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오리온과 능금>(1932)을 기점으로 하여 <돈(豚)>, <수탉>(1933) 등은 이 같은 그의 문학의 전환을 분명히 나타내주는 작품들이다. 1933년 8월에는 경성제대 법문학부 영문학전공 후배인 조용만, 최재서 등과 함께 순수문학단체를 표방한 '구인회'에 창립 멤버로 가입하여 순수문학의 방향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다만 경성부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지방인 함북 경성군에 거주하면서 구인회에 자주 참여하지는 못하여 점차 흐지부지되었다고 한다.

 

이효석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 재직 시절

이효석은 1934년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평양으로 이주하였다. 오늘날로 치면 대학에 해당하는 고등교육기관인 구제전문학교의 교수 직위에 앉은 셈으로, 이제야말로 경제적으로 여유를 갖추게 된 이효석은 1936년에 걸작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는 등 전성기를 맞았으며,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발표했다. 1938년 숭실전문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되고 나서, 숭전의 시설을 활용해 세워진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를 맡았다. 지인들 앞에서 이효석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면서 호강을 부리던 놈이 객기로 그만둔 것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나, 먹고살고자 다시 왜놈에게 아첨을 하는 글을 쓰는 건 두고두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오."

 

1939년과 1940년 두 차례 하얼빈을 여행하고 이 유럽풍 도시에서 벽공무한, 하얼빈 등의 작품을 썼다.

같은 해 차남 영주가 태어났으나, 1940년에 안타깝게도 처와 자식 둘 다 병으로 연이어 세상을 뜨고 만다. 아직 젊은 나이인데다 여러 번 만주 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건강하던 그 역시 이로 인해 큰 충격을 받고 이듬해인 1941년, 뇌막염에 걸려 대수술을 받았다. 그 자신도 병마로 고생하던 이효석은 1942년 5월, 평양도립병원에 입원했으나 불치의 진단을 받고 퇴원한지 얼마 되지 않은 25일, 향년 35세의 나이에 결핵성 뇌수막염으로 사망했다. 

 

 

이효석

 

 

작품

그의 저작 활동은 100편에 가까운 단편에 집중되어 있으나, 경성제일고보 재학 중에 발표한 시를 비롯하여 장편소설, 수필, 평론, 희곡 · 시나리오, 번역 등 다방면에서 작품을 발표하였다.

단편집 기준으로 그의 대표작을 추리면, <노령근해(露領近海)>, <해바라기>, <이효석단편집>등이 있다.

장편으로는 『화분(花粉)』(1939년 작), 『벽공무한(碧空無限)』(1941년 작)이 있으며 이 중 『화분』은 1972년 하길종 감독이 영화화하였다.

110편이 넘는 수필을 발표하여 당대에는 수필가로서도 명망이 높았으며 중 · 고교 교과서에 실린 바 있는 「낙엽을 태우면서」가 대표작이다.

1달에 7~8편의 영화를 감상한 영화광이라 전하며, 직접 희곡과 시나리오를 창작하기도 하였다. 1930년에는 김유영(金幽影), 서광제(徐光齊), 안석영(安夕影) 등과 함께 ‘조선씨나리오·라이터협회’를 결성하고 연작 시나리오 「화륜(火輪)」을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은 침체의 늪에 빠진 당시 조선 영화계에 활력을 주었다고 평가 받는다. 그가 창작한 희곡 · 시나리오 7편 중 생전에 영화화한 작품은 <화륜>(1931년 개봉, 김유영 감독), <애련송(愛戀頌)>(1939년 개봉, 김유영 감독)[16]이 있다.

단편소설 중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황제>라는 작품이 있다. 말년에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된 나폴레옹이 임종 직전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는 형식의 1인칭 소설. 삼국지 등 동아시아식 영웅 소설을 연상케 하는 문장과 표현을 사용해 색다른 장엄함과 비장함을 느낄 수 있다.

제목 없는 미발표 단편 소설이 2011년 번역 공개되기도 하였다. 

 

평가

메밀꽃 필 무렵을 포함한 단편 몇 개를 제외하면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는 받지 못한다. 전형적인 원히트원더. 특히 장편들은 평이 나쁘다. 장편 소설가 이효석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무재능. 그나마 화분 정도가 언급되는 정도. 장편소설은 글이 다소 거칠더라도 서사 먼저 있고 문장이 다음인데 이효석은 아주 전형적인 문장만 예쁜 작가였다. 서사를 묵직하게 끌어가며 메시지를 주는 능력이 부족해서 그의 작품들은 항상 기승전결의 '결'에 가면 힘이 빠져 흐지부지되어버린다. 당연히 글이 길어지면 질수록 이 단점이 커지니 장편들에 대한 평이 특히 박하고, 단편 몇 개만 기억에 남은 것이다.

그런 이효석이 지금까지 기억되고 이상, 김동인, 김유정 같은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가들과 같이 자기 이름을 딴 문학상을 갖게 되고, 일반인들 사이에선 거장이라는 과분한 대우를 받는 것은 전적으로 친구 잘 둔 덕이다. 절친한 친구 유진오가 소설가이자 학계, 정계의 거물이라 정치권력을 뒤에 두고 문단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간 친구를 기리고 부각시키는 데 성심을 다했다. 반민족 행위 경력이 있음에도 오래 회자되는 작가들은 서정주나 김동인처럼 차마 지워 없앨 수 없을 정도로 문학적 성과가 뚜렷한 작가들이 대부분인데 이효석은 유진오의 판깔기로 예외가 될 수 있었다.

김동리는 그의 작풍에 대해 '소설을 배반한 소설가'라는 평을 내렸다. 비판이 아니라 거의 시인이 소설을 쓰듯, 소설의 분위기를 잡는 데 능하다는 반어이다. 이는 그의 작품 중 메밀꽃 필 무렵에 잘 나타난다.

 

주요 작품
  • 《도시와 유령》 - 1928년(22세[3])
  • 《돈(豚)》
  • 《수탉》
  • 《장미 병들다》 - 1938년 (32세)
  • 《산》
  • 《들》
  • 《메밀꽃 필 무렵》 - 1936년 (30세)
  • 《화분(花粉)》- 1939년 (33세)
  • 《행진곡(行進曲)》 -1929년(23세)
  • 《기우》 - 1929년(23세)

 

*위키백과와 나무위키 발췌함*


작품 중 

 

근대문학 <라오콘의 후예>_이효석

 

# 1.

무덥고 답답한 것은 오히려 참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몰려드는 파리떼야말로 역물이다.

편집 시간을 앞두고 수선스럽고 어지럽고 초조한 편집실의 오후를 파리떼는 제 세상인 듯 들끓고 있다. 얼굴과 손을 간질이다가는 목탄지 위에다 불결한 배설을 하고 날아가곤 한다.

"추잡한 방안이 천재의 있을 환경이 못 되누나."

삽화가 마란은 시간이 촉박하였음에도 그날 소설에 들어갈 삽화를 아직도 그리지 못한 채 파리와의 싸움에 정신이 없다. 천재로 자처하는 그에게 휘 답답한 편집실은 버릇없기 짝없는 곳이다.

"천재를 괴롭히는 이놈의 추물 - 이놈의 미물 - 이놈의 속물······."

파리채 밑에서 한 마리 두 마리 꺼꾸러져 책상 위에 볼 동안에 적은 시체의 무더기가 늘어간다. 마란이 중얼거리는 어투에는 비단 파리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은근히 편집실 안에 웅성거리는 천재 아닌 뭇 미물들을 조롱하는 마음도 있다. 국장을 비롯해 과장, 부장, 주임, 기자, 사무원, 급사 등 흡사 파리떼만큼이나 흔한 속물들도 마란의 비위에는 파리떼와 고를 배 없는 평범하고 용렬하고 하잘것없는 존재로밖에는 비취이지 않는다. - 조물주는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도 흔한 미물들을 파리떼와 인간들을 만들었누. 이 흔한 미물들이 죄다 조물주의 똑같은 총애를 바랄 권리가 있단 말인가.

# 2.

신문사 뒤 문간에 사람들이 둘러싸고 선 것은 아마도 또 무슨 장사치리라. 약 장수도 오고 붓 장수도 왔다. 어떤 때에는 인삼 장수가 와서 메마른 이끼 속에 도라지같이 꼬치꼬치 꼬인 풀뿌리를 헤치면서 사람들을 모았고 때로는 자라 장수가 나타나서 산 자라의 옆구리를 찔러 선지를 내서 입술에 묻히면서 부족증에는 직효라고 선전하는 것이었다. 뒤 문간에는 언제나 이렇게 온전하지 못한 객꾼만이 모여드는 법인 모양이다. 오늘은 또 무슨 장사치인구 하고 마란은 가까이 가서 사람들 틈으로 엿보다가 뜨끔해서 소스라치면서 뒷걸음질쳤다.

조그만 나무궤를 안고 선 것은 땅꾼이었다. 궤 속에 한 뭉치가 되어 굼실굼실 늘이고 누운 것은 독사의 한 떼. 삼단같이 흩어지고 서리어서 고개들을 곧추 들고 철망 속에서 혀를 널름거리는 꼴은 흡사 세상을 저주하려는 것인 듯 보는 눈에 능굴지고 께름칙한 독을 껴 얹는다. 이놈의 미물은 대체 무슨 인연으로 아담 때부터 사람의 원수가 되었누. 사람들은 그 흉직한 꼴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둘레둘레 그것을 둘러싸고 보고 섰음은 또 무슨 까닭일꾸. 뭇시선 앞에서 자랑스럽게 그 한 놈의 목을 손가락으로 올켜 쥐고 널름거리는 혀를 뽑아 보이는 땅꾼의 심청머리도 또한 알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자식이 아니요 뱀의 종족이란 말인가. 그렇게 대담하고 추잡하고 야만스런 그 녀석은.

"이놈의 미물두 결국 내게 영감을 주지는 못하누나. 내 예술을 싹트게 하지는 못하누나. 우리 조상의 원수는 내게두 필경은 원수밖에는 못 되누나."

마란은 외면하고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그 미물을 아름답게 노래한 옛 시인을 생각했다. 아롱거리는 등어리를 햇빛에 반짝이면서 풀 속으로 굼시르르 사라지는 뱀의 모양을 찬미한 시인의 심청머리는 또 대체 어떤 것이었던구. 그 능굴진 추물의 모양이 시의 세상에서는 아름다울는지 몰라도 그림 속에서 빛날 리는 만무해. 푸르고 붉은 늘메기의 색체라면 또 몰라도 단조로운 회색만의 독사의 꼴이 그림이 될 수는 만만 없는 노릇이야. 아무리 천재기로서니 현대화에 있어서 그 추물을 취급할 수는 없구 말구······.

 

라오콘(그리스어: Λαοκόων)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폴론을 섬기는 트로이의 신관이다. 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군의 목마를 트로이 성안에 끌어들이는 것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신의 노여움을 사, 해신 포세이돈이 보낸 두 마리의 뱀에게 두 자식과 함께 졸려 죽었다.

 

 

근대문학 <들>_이효석

 

꽃다지, 길경이, 나생이, 딸장이, 먼둘네, 솔구장이, 쇠민장이, 길오장이, 달래, 무릇, 시금초, 씀바구, 돌나물, 비름, 능쟁이.

들은 온통 초록 전에 덮여 벌써 한 조각의 흙빛도 찾아볼 수 없다. 초록의 바다.

초록은 흙빛보다 찬란하고 눈빛보다 복잡하다. 눈이 보얗게 깔렸을 때에는 흰빛과 능금나무의 자줏빛과 그림자의 옥색빛밖에는 없어 단순하기 옷 벗은 여인의 나체와 같은 것이, 봄은 옷 입고 치장한 여인이다.

흙빛에서 초록으로-이 기막힌 신비에 다시 한번 놀라 볼 필요가 없을까.

땅은 어디서 어느 때 그렇게 많은 물감을 먹었기에 봄이 되면 한꺼번에 그것을 이렇게 지천으로 뱉어 놓을까, 바닷물을 고래같이 들이켰던가. 하늘의 푸른 정기를 모르는 결에 함빡 마셔 두었던가.

그것을 빗물에 풀어 시절이 되면 땅 위로 솟쳐 보내는 것일까.

그러나 한 포기의 풀을 뽑아 볼 때 잎새만이 푸를 뿐이지 뿌리와 흙에는 아무 물들인 자취도 없음은 왠일일까. 시험관 속 붉은 물에 약품을 넣으면 그것이 금시에 새파랗게 변하는 비밀-그것과도 흡사하다. 이 우주의 비밀의 약품-그것은 결국 알 바 없을까. 한 톨의 보리알이 열 낟으로 나는 이치는 가르치는 이 있어도 그 보리알에서 푸른 잎이 돋는 조화의 동기는 옳게 말하는 이 없는 듯하다.

사람의 지혜란 결국 신비의 테두리를 뱅뱅 돌뿐이요, 조화의 속에 속은 언제까지나 열리지 않는 판도라의 상자일 듯싶다. 초록 풀에 덮인 땅속의 뜻은 초록 옷을 입은 여자의 마음과도 같이 엿 볼 수 없는 저 건너 세상이다.

얀들얀들 나부끼는 초목의 양자는 부드럽게 솟는 음악.

줄기는 굵고 잎은 연한 멜로디의 마디마디이다. 부피 있는 대궁은 나팔 소리요, 가는 가지는 거문고의 음률이라고도 할까. 알레그로가 지나고 안단테에 들어갔을 때의 감동-그것이 봄의 걸음이다. 풀 위에 누워 있으면 은근한 음악의 율동에 끌려 마음이 너볏너볏 나부낀다.

꽃다지, 질경이, 민들레···. 가지가지 풋나물을 뜯어 먹으면 몸이 초록으로 물들 것 같다. 물들어야 될 것 같다. 물들어야 옳을 것 같다. 물들지 않음이 거짓말이다. 물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새가 지저귄다. 꾀꼬리일까.

지평선이 아롱거린다.

들은 내 세상이다.

 

메밀꽃 필 무렵, 돈, 산, 사냥, 장미 병들다, 수탉, 들저자이효석출판달시루발매2018.12.17.

*길경이(질경이), 나생이(냉이), 먼둘네(민들레), 솔구장이(소루쟁이), 시금초(수영), 씀바구(씀바귀), 능쟁이(명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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