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의 이해
고대부터 현대까지 우리 민족의 일부인 국어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문자가 없었던 시기부터 한 언어적 뿌리 안의 조상들의 의사소통 시작이며 국어를 더 잘 표현하고 공통의 소리와 발음 규칙을 만들고, 기록하기 위해 한자를 가져와 여러 방안을 마련하지만 우리말을 잘 기록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시대 구분하여 언어의 변천과정을 알고 문헌자료 참고하여 국가적으로 연구해 나아가고 있다.
국어의 계통, 국어의 형성, 국어의 변천 이 3가지를 주목하여야 하고 역사학적 관점, 언어학적 관점의 차이에 따라 이해목적이 달라 아직 풀어나가지 못한 과제도 많다. 민족학적 분류로 나아가면 다른 나라와 구별된다. 언어는 음운의 변화, 문법 체계의 변화, 어휘의 변화를 겪는다. 국어의 음운은 동일한 환경 속에서 규칙성을 띄며 변화하거나 조건이 없이도 변화하기도 한다. 문법은 문법범주가 시간을 거치며 서서히 없어지거나 새로이 생겨나기도 하고 형태가 바뀌기도 한다. 어휘는 가장 많은 변화를 겪으며 소멸과 생성을 거듭하고 있다.
국어는 중세시대 훈민정음 창제 이전과 이후로 우리말의 표기방법이 달라지는 계기가 된다. 우리말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문자가 생겨남에 따라 문헌자료 연구가 심화될 수 있었다. 국어가 형성된 고대 시점에는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표기했고, 중세에 이르러 훈민정음과 병행된 한자표기가 있어왔다.
국어사의 문자체계
1) 훈민정음 이전의 우리말 표기방법에 관하여
기자조선어, 위만조선어, 진한어, 신라어, 백제어, 고구려어는 우리 조상으로 여겨지는 고대 여러 족속들의 언어를 가리킨다. 고대국어는 고유 문자가 없어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표기했다. 한자가 들어온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 고대 삼국은 역사서인 ‘유기’, ‘서기’, ‘국사’를 일찍이 한문으로 사용했다. 문어와 구어의 이중 언어 사용은 국어의 어휘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다음은 한자를 이용한 우리말의 표기방법이다.
한자 차용 표기법에는 음독과 석독이 있다. 우선 음독은 표음적 기능만 취한 것으로 의미와 상관없이 음을 나타내는 기호로 사용한 것을 말한다. 석독은 반대로 표의적 기능만 내 것으로 하여 음과 상관없이 단어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했다. 그 예로 ‘水’자를 고구려에서는 ‘매’, 신라에서는 ‘믈’이라고 썼다. 이것은 우리 선조들의 독창이라 할 수 있다. 한문을 우리나라 식으로 고쳐진 것을 이두라 한다. 고유명사 표기뿐 아니라 문장을 표기하려는 노력으로 발전하였다. 「임신서기석」, 「남산 신성비」,「갈항사 조탑기」는 7세기 신라시대 이두 자료이다. 이두는 국어 문장 구조를 따르고 ‘토’에 해당하는 조사와 어미까지 표기한다. 구결은 ‘토吐’라고도 하는데 한문을 읽을 때 사용하고 신라시대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이두는 고려에서 19세기말 조선까지도 계속 사용되었고, 오늘날 전해지는 자료는 모두 조선 시대의 것이다.
구결은 신라 시대 시작되어 이두를 만든 설총이 구결발달에 공헌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두와 구결의 공통점을 한문을 좀 더 수월하게 우리말에 알맞도록 표기하기 위함이다. 다만 이두는 단어배열, 문법구조, 조사 표기가 있어 문법적 요소를 제거하면 한문 원문으로 복기가 되지 않는다. 구결은 한문을 읽을 때 우리말 문법 요서를 끼워 넣는 식이어서 그 부분만 제거하면 한문으로 그대로 복기가 된다. 향찰은 이두와 구결의 확대로 이루어진 표기체제이다. 기존의 고유명사 표기법과 함께 시행되었다. 원칙은 실질적 의미를 가진 어간은 석독 표기, 문법적 요소는 음독표기였다. 현존하는 향찰자료는 향가에 국한 되어있다. 신라시대에 본격적으로 한자를 이용하여 자국어를 표기하려 지대한 노력을 퍼붓고 향가문학발전에 향찰 표기법을 이용했다. 그러나 국어의 구조가 복잡하고 음절 구조 수가 많아 성공이 어려웠다.
2) 전기 중세국어 연구 자료에 관하여
중세국어시대는 10세기 초 고려왕조로부터 오늘의 개성이 중심지가 되어 시작한다. 방언이 새로운 중앙어로 성립되고 오늘날 까지도 이어진다. 지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어휘 요소를 가지고 있었으나, 고구려어는 소멸의 길로 가고 신라 중앙어는 영향력이 커졌다. 이와 같은 전기 중세 국어를 연구하기 위한 전해지는 자료는 다음과 같다. 중국 송나라의 봉사고려국신서장관 손목이 12세기 초에 편찬한 『계림유사』가 있다. 원본은 전해지지 않으나 『고금도서집성』과 『설부』에 그 초록에 짤막한 ‘방언’이 기록되어 있다. 손목이 고려에 와 기록한 사실이 확인되며, 이 표기를 읽기위해 손목이 사용한 중국 송나라 한자음을 알아야 올바른 해독이 된다.
『계림유사』의 한자의 용법은 다음과 같다. 책의 저자인 손목은 한자의 새김은 이용하지 않고 음音만을 이용하였고, 고대 표기법 음독자가 사용되지 않았고, 고려어의 구어와 문어 구별이 없는 걸로 보아 편찬을 직접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밖에도 방언에 사용된 한자는 표의성이 짙고 중국 편찬 자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며, 국어단어를 중국어로 설명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향약구급방』은 약재로 사용된 180여종의 동식물 등에 대한 요약이 설명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오랜 된 의약서다. 이 책의 구어 자료로서 가치 있는 이유는 한자 차용 표기로 향명들이 기입되어 있고, 국어의 음운 체계에 관한 중요한 사실을 밝힐 근거가 되어 한자 차용 표기법을 연구하는 좋은 자료이다. 표기법은 고대 한자 차용 표기법의 전통을 이어 석독, 음독, 혼합표기를 지니면서 13세기 중엽의 국어 어휘를 사용하였다.
차용어는 고려와 원에서 일부 흔적이 남아 있고 대부분 15세기 이후에 문자로 기록되었다. 몽골어 차용어는 말馬, 매鷹, 군사軍事로 국한 되어 있다. 수적으로 몇 안 되는 차용어는 음운체계에 대한 흥미있는 시사점을 준다. 16세기 차용어 참고자료로는 『번역박통사』, 『훈몽자회』, 『응골방』등이 있다. 그밖에 전기 중세국어 기타 자료에는 일본자료『이중력』과 중국자료 송나라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 고려가요『악학궤범』, 『악장가사』, 『고려사』,『구역인왕경』등이 있다. 고려가요인 노래가 문자로 정착된 시기 15세기 후반이며, 한문으로만 쓰인 『고려사』는 인명, 지명, 광명 등에 관한 광범한 자료며, 『구역인왕경』불경들이며 문법에 관한 중요 자료이다.
3) 문자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체계에 관하여
문자 훈민정은은 우리나라의 중세시대 조선의 세종대왕에 의해 창제되었다. 독창성과 과학성을 띈 문자체계로 음운 이론을 바탕으로 제자 원리를 고안해 냈다. 가장 큰 특징은 한 음절의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고 결합하는데 있다. 그리고 음운을 분석하여 나온 결과가 완벽하다. 다음은 문자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체계에 관하여 요약하고 서술하였다. 훈민정음의 체계는 당초 초성 17자, 중성 11자, 종성 11자, 총 28자 체계다. 중국의 음운 이론을 바탕으로 하나 우리나라는 한 음정을 초성, 중성, 종성으로 삼분하여 중국의 전통적 성과 운을 가진 이분법과는 차이가 있다. 삼분법의 성공은 “종성부용초성”이라 하여 초성과 종성이 동일하게 인식된 원리에 있다.
훈민정음의 초성과 중성 체계는 다음과 같다. 초성은 중국 음운학의 자모 체계와 관련 있다. 정음의 초성체계는 아음, 설음, 순음, 치음, 후음, 반설음, 반치음으로 나누고, 전청, 차청, 전탁, 불청불탁으로 같은 술어 사용이 증명한다. 반면 중성은 해당사항이 없어 독자적으로 만들었다. 초성 17자의 제자원리는 상형의 원리, 가획의 원리 두 가지다. 상형의 원리는 조음에 관여하는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든 것이고, 가획의 원리는 초성자의 기본자에 획을 더함으로써 형성된 이체자다. 아음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은 모양, 설음은 ‘ㄴ’은 혀가 윗잇몸에 닿은 모양, 치음 ‘ㅅ’은 이의 모양, 후음 ‘ㅇ’은 목구멍의 모양을 본뜬 것을 말한다.
중성의 기본자는 천天, 지地, 인人으로 삼재의 모양을 본떴다. ㆍ, ㅡ, ㅣ은 각각 하늘의 둥근 모양, 땅의 평평한 모양, 사람이 서 있는 모양을 각각 본뜬 것이다. 중성자 8글자 ‘ㅗ, ㅏ, ㅜ, ㅓ, ㅛ, ㅑ, ㅠ, ㅕ’는 기본자의 합성으로 이루어 졌다. 그 밖의 중성 글자들은 이들 11자를 합용한 것이다. 병서와 연서 표기법은 우선 병서는 둘 또는 세 문자를 좌우로 결합하여 표기하는 것을 말한다. 동일 문자 결합은 각자병서, 서로 다른 문자의 결합은 합용병서라 한다. 초성 각자병서에는 ‘ㄲ, ㅃ, ㄸ, ㅉ, ㅆ, ㆅ’ 등이 있고, 초성 합용병서에는 ‘ ㅺ, ㅼ, ㅽ, ㅳ, ㅄ, ㅶ, ㅷ, ㅴ, ㅵ, ㅻ’ 등이 있다. 그리고 연서는 문자의 상하로 결합하는 방법을 말하며 ‘ㅱ, ㅸ, ㆄ, ㅹ’ 등이 있다. 합자란 초성, 중성, 종성이 음절을 표시하는 결합체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훈민정음 체계는 음소가 있고 결합한 음절이 발생되어 이중적인 대응 관계가 나타난다. 방점이란 중세어의 성조 표시를 말하는데 중국이 성조가 중시된 것과 관련 있다. 중국어의 사성 체계 그대로 따르지 않고 국어의 평성(無點), 거성(1點), 상성(2點)의 성조 체계를 만들었다.
4) 후기 중세국어 음운 및 문법의 체계에 관하여
4-1) 후기 중세국어의 음운 체계
훈민정음은 국어에 대한 음운 분석의 결과로 음운 체계가 잘 반영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언어든지 문자와 음운이 완벽하게 일치하긴 어렵다. 국어 또한 음운이 사실대로 표기되기 어렵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음은 후기 중세국어의 음운 체계의 자음과 모음, 성조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우선 15세기 중엽 자음체계는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평음 ‘ㅂ, ㄷ, ㄱ, ㅈ, ㅅ, ㅎ’, 유기음 ‘ㅍ, ㅌ, ㅋ, ㅊ’, 된소리 ‘ㅽ, ㅼ, ㅺ, ㅆ, ㆅ’, 유성마찰음 ‘ㅸ, ㅿ, ㅇ’, 비음 ‘ㅁ, ㄴ, ㆁ’, 유음 ‘ㄹ’이다. 어두에 두 자음군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고, 후기 중세국어에서 사용됐다.
15세기 국어는 훈민정음의 초성 체계 따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된소리는 한자음에 없고, 『동국정운』서문에 탁성 ‘ㄲ, ㄸ, ㅃ, ㅆ, ㅉ, ㆅ’ 표기 되어 있으나, 국어의 표기에는 어두에 ‘ㅆ, ㆅ’ 뿐이다. 어두 된소리는 마찰음에 국한된 것을 볼 수 있다. 훈민정음 문자 중 ‘ㅅ’은 예로부터 ‘된시옷’이란 불렸다. 합용병서 ‘ㅺ, ㅼ, ㅽ’등이 주목된다. 15세기 중엽엔 ‘된시옷’이었다 여겨지며, 이 ‘사이시옷’은 된소리와 깊은 관련이 있다. 된소리 계열은 15세기 후반보다는 앞서 등장했음에 타당하다 여기고 있다. 그 이유는 15세기 중엽 『법화경언해』,『두시언해』부터 16세기 『속삼강행실도』,『훈몽자회』,『분문온역이해방』등에 어두음이 된소리화 한 예들이 여러 군데에 보이며 이런 된소리 계열이 표현적 가치를 가지기 위해선 이미 이러한 된소리가 어두에서 확고한 지반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조선관역어』의 ‘ㅸ’ 음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정음 문헌에서 ‘ㅸ’ 표기된 것은 『훈민정음』해례 용자례와 『아미타경언해』,『목우자수심결언해』등 문헌에서 산발적으로 존속한다. ‘ㅿ’은 『훈민정음』해례에서 불청부탁의 반치음이라 하여 모음 간, ‘ㄴ’ 또는 ‘ㅁ’과 모음 사이, 모음과 ‘ㅸ’ 또는 ‘ㅇ’ 사이에 국한되어 사용되었다. ‘ㅇ’은 15세기 문헌을 통해 두 종류였음을 밝혀낸다. 위의 ‘ㅸ’, ‘ㅿ’, ‘ㅇ’은 15세기 유성마찰음으로 추정하고 있다. 매우 제한된 분포를 가져 소실되고 만다. 『훈민정음』해례 종성해는 ‘ ㄱ, ㆁ, ㄷ, ㄴ, ㅂ, ㅁ, ㅅ, ㄹ’ 8종성이다. 15세기 중엽에는 음절말 위치에서 평음과 유기음의 대립이나 ‘ ㅅ, ㅈ, ㅊ’ 대립이 중화되었다. 한편 9자음 대립이 유추되는데 ‘ㅿ, ㅇ’의 ‘ㅇ’이 소실되고 음절말의 ‘ㅿ’ 사라졌으며, ‘ㅅ’과 ‘ㄷ’의 중화된 결과 7자음 체계에 도달한다. 음절말에는 한 자음만이 올 수 있고, 자음군은 ‘ㄺ, ㄼ, ㄺ’ 등 ‘ㄹ’이 앞에 있는 경우에 한정 되었다.
다음은 15세기 7개 단모음 ‘․, ㅡ, ㅣ, ㅗ, ㅏ, ㅜ, ㅓ’이 있다. 중세국어의 모음 체계가『몽고자운』몽골어 차용어와『계림유사』의 검토에서 드러난 사실로써 고대 국어의 모음 체계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추정되며, 후기 중세국어의 모음 체계와의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14세기에 모음 추이가 있었음을 가정할 수 있다. 모음체계의 불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모음 ‘․’의 단계적 소실로 이어진다. 후기 중세국어는 풍부한 이중모음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중모음 체계는 상향 이중모음, 하향 이중모음으로 이뤄져 있으며, 상향이중모음은 ‘ㅑ, ㅕ, ㅛ, ㅠ’로 표기되며, 하향이중모음은 ‘ㆎ, ㅐ, ㅔ, ㅚ, ㅟ, ㅢ’로 표기된다. 모음조화는 가장 현저했다. 양모음 또는 음모음만 있을 수 있고, 중립모음은 어느 것과도 연결될 수 있다. 양모음 ‘․, ㅗ, ㅏ’, 음모음‘ㅡ, ㅜ, ㅓ’, 중립모음은 ‘ㅣ’이다. 고대국어나 전기 중세의 모음체계에는 양모음과 음모음의 양계열이 일치가 나타나다 후기에는 일치하지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전기에서 후기로 넘어오는 과정에서서 큰 변화를 겪어 모음 조화 규칙은 그대로 존속되었다. 마지막으로 후기 중세국어의 음음 체계에 관한 성조에 대해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중세국어는 성조 언어라고 할만하다. 훈민정음 창제시 국어의 성조 체계를 비교적 정확히 알맞은 방점법을 마련해 사용하였다. 15세기 방점 표기는 16세기 전반에 보아도 무너진 흔적이 없다. 그러나 16세기 말 방점 표기가 불규칙해져 이미 완전히 소멸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4-2) 후기 중세국어의 문법 체계
둘 이상의 형태소로 이루어진 단어를 복합어라 한다. 이 복합어가 만들어지는 방법을 조어법이라 한다. 복합어에는 합성어와 파생어가 있다. 대등한 형태소끼리 결합한 것을 합성어라 하고, 기본이 되는 형태소에 부차적인 형태소가 붙어 형성된 것을 파생어라 한다. 다음은 합성어와 파생어를 요약해 보았다. 합성어는 합성명사와 합성용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합성명사는 현대어와 다르지 않다. 중세어에서 ‘수ᄐᆞᆰ, 암ᄐᆞᆰ, 안팏, 니ᄡᆞᆯ, 조ᄡᆞᆯ’은 현대에 화석으로 남아 ‘수탉, 암탉, 안팎, 입쌀, 좁쌀’이 되었다. 합성명사는 중세국어에서 비통사적 합성방식이 매우 생산적이었다. 용언 어간이 직접 연결되어 새로운 합성용언을 만들어 냈다. 합성동사 ‘빌먹-, 딕먹-, 것곶-, 듣보-, 죽살-’ 등이 있고, 합성형용상 ‘됴킃-, 놉ᄂᆞᆺ갑-’ 등이 있다.
파생어는 주로 접미사에 이뤄지며, 체언이나 용언 어간에 접미사를 연결하여 형성된다. 파생명사, 파생동사, 파생형용사, 파생부사는 다음과 같다. 파생명사는 명사+‘-이, -억, -오ᇰ, -아지’는 명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그 예로 ‘부허ᇰ이, 그려기, 아비, 어미, 터럭, 기도ᇰ, 숑ᅌᅡ지, 강ᅌᅡ지’ 등이다. 용언어간의 파생된 것 동사 어간 ‘-(ᄋᆞ/으)ㅁ, -이’ 형용사 어간 ‘ᄋᆡ/의’이 있고, 그 예로 ‘여름, 사ᄅᆞᆷ, 거름, 어름 ; 우ᅀᅳᆷ우ᅀᅵ, 죽사리, 글지ᅀᅵ ; 킈, 기픠, 노ᄑᆡ, 노ᄑᆡ, 너븨, 기릐' 등이 있다. 파생동사는 명사 어간에서 파생된 ‘무ᇧ-, 자히-’과 용언어간에서 파생된 사동 접미사와 피동 접미사가 있다. 사동 접미사는 ‘-ㅎ-, -ㅸ-, -ㅎ-, -ᄋᆞ-’ 등이며 그 예로 ‘너피-, 구티- ; 숨기-, 밧기- ; 으ᇫ이-, 지ᇫ이-, 말이- ; 셰-, 내- ; -오/우-, ᄀᆞ리ᄫᆞ-, 모도-, 일우-’ 등이며, 피동 접미사는 ‘-히-’의 경우와 거의 같다.
파생행용사는 명사 어간에서 파생된 접미사 ‘-ᄃᆞᄫᆞ-’, 용언 어간에서 파생된 것 접미사 ‘-ᄫᆞ-, -아ᇦ-, -가ᇦ’에 의해 형성되며, 파생부사는 체언에서 파생된 ‘몸ᅀᅩ, 손ᅀᅩ’, 용언에서 파생된 동사 및 형용사 어간에 ‘-이, -히, -오’이며, 그 예로 ‘노피, 기리, 기피, 키, 너비 ; ᄀᆞᄃᆞᆨ히, 이러히 ; 도로, 나ᅀᅩ’ 등이 있다. 중세국어의 곡용에서는 체언 어간이 교체를 보여주는데 자동적인 것과 비자동적인 것이 있다. 체언도 용언과 같이 비자동적 교체를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현대국어에서는 체언은 자동적 교체만 보여주며, 용언의 어간은 비자동적 교체다. 다음은 곡용의 ‘ㅎ’ 말음 명사, 비자동적 교체, 격조사, 대명사의 곡용에 대한 설명이다.
‘ㅎ’을 말음으로 가지는 명사의 예로 ‘돌石’은 단독형 ‘돌’이라만 곡용형은 ‘돌히, 돌해, 돌ᄒᆞᆯ, 돌ᄒᆞ로, 돌콰’이다. 이밖에도 ‘ㅎ’을 말음으로 가지는 명사들의 예로 ‘돌, ᄯᅡ, 하ᄂᆞᆯ, 길, 내, 시내, ᄀᆞᅀᆞᆯ, 나조, 우, 뒤, 안, 뫼, 드르, ᄆᆞᅀᆞᆯ, 암, 수, 알, 고, 니마, ᄇᆞᆯ, ᄉᆞᆯ, 뎌, ᄂᆞᆯ, 밀, 조’ 등이 있다. ‘나모(木), 노ᄅᆞ(獐), ᄆᆞᄅᆞ(棟), 아ᅀᆞ(弟)’은 ‘나모~나ᇚ ; 노ᄅᆞ~놀ㅇ ; ᄆᆞᄅᆞ~ᄆᆞᆯㄹ, 아ᅀᆞ~아ᇫ’으로 비자동적 교체를 하는 예이다. 격조사는 주격, 속격, 처격, 대격, 조격, 공동격, 호격 조사가 있다. 각각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주격조사는 ‘ㅣ’이 명사가 모음으로 끝날 때 그 모음과 하향이중모음을 형성한다. 예로 ‘사ᄅᆞㆍ미, 부테, ᄃᆞ리, 불ㆍ휘’이다. 속격조사는 유정물의 평칭에 ‘-ᄋᆞㅣ,의’, 유정물의 존칭과 무정물에는 ‘ㅅ’이다. 처격조사는 ‘-ᄋᆞㅣ,의’, ‘-애/에/예’, 대격 조사는 ‘-ㄹ’, ‘-ᄅᆞᆯ/를’, 조격 조사 ‘-로’, 공동격 조사는 ‘-와/과’, 호격 조사 존칭은 ‘-하’이며, 평칭은 ‘-아’이다.
대명사의 곡용은 1인칭 대명사, 2인칭 대명사, 미지칭, 무엇, ‘어느’가 있다. 1인칭 대명사는 ‘나’의 주격형 ‘ㆍ내’(거성), 속격형 ‘내’(평성)이며, 2인칭 대명사는 ‘너’의 주격형 ‘:네’(상성), 속격형 ‘네’(형성)이다. 미지칭 ‘누’의 주격형은 ‘ㆍ뉘’(거성), 속격형 ‘:뉘’(상성)이며, 무엇은 ‘므스, 므슥 ; 므슴’, ‘어느’는 현대국어에서는 관형사지만 중세국어는 대명사다. 주격형 ‘어늬’, 대격형 ‘어늘’, 부사로 ‘어찌’의 뜻으로 사용된 예도 있다. 마지막으로 후기 중세국어의 문법 체계의 특수 조사에 대한 설명이다. 중세국어에는 특수조사가 다양하다. 고대 명사와 용언에서 기원한 것으로 체언은 속격을, 용언은 대격, 조격을 지배했다. ‘게, 그에, 거긔, 손ᄃᆞㅣ’는 속격 ‘ᄋᆞㅣ’의 지배, ‘ᄃᆞ려’는 ‘ᄃᆞ리-’는 부동사형으로 대격을 지배, ‘ㄴ’은 ‘ᄋᆞᆫ/은 ; ᄂᆞᆫ/는’으로 나타났다. 그밖에도 ‘ᄀᆞ장’은 속격 ‘ㅅ’을 지배, ‘자히’는 동작 또는 상태 지속의미며, ‘두고, 라와’는 비교를 나타내는 조사, ‘셔’는 ‘이시-’의 부동사형이며, ‘브터’는 대격(원인), 조격(출발점) 지배, ‘더브러’는 ‘더블-’의 부동사형, ‘조차, 조초, 조쳐’는 ‘좇- ; 조치-’의 기원, ‘다ᇦ-’에서 파생된 부사가 조사로 굳은 것이다.
5) 근대 국어 음운과 문법의 변화에 관하여
5-1) 근대 국어의 음운 변화
근대국어는 중세국어에서 현대국어에 이르는 하나의 과도기에 해당한다. 훈민정음 창제 15세기 이후 16세기 말 이전에 우리 사회와 문화는 새로운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나 임진왜란을 겪으며 혼란 속에 언어 변화의 원인을 두고 잘못된 착오를 한다. 전란이 중세에서 근대 국어에 영향을 줬을 거란 잘못된 이해를 하게 되었다. 17세기 초부터 19세기 말까지 3세기에 걸친 근대국어는 전란 이전부터 국어의 변화가 있었고, 전란이 지난 후에는 근대적 면모를 띄우게 되었다. 근대국어의 음운사적 관점에서 음소 ‘ㅿ’의 소멸, 성조의 소멸, 어두 평폐쇄음의 경음화 내지 유기음화 등 중요 음운상의 변화와 문법상의 변화는 16세기 말 이전 중세시대에서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전란이 언어 변화의 요인이 될 수 있으나 변화는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에 나타나는 것이 원론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뒤로 사회 안팎으로 새로운 문물을 접하며 자극을 받아 학문과 문학이 대두되었고, 서민 문학이 발전하였다. 근대국어의 연구는 자료의 양과 질에서 부족함이 없고, 현대국어의 직접적 영향을 주고 있다.
다음은 근대국어의 음운 변화에 대하여 된소리, 모음 ‘ㆍ’의 소실, 이중모음의 단모음화, 음운체계, 구개음화, 원순모음화와 전설모음화에 대해 서술하였다. 중세국어의 어두 자음군은 17세기 초엽에 혼동이 나타난다. 사실상 ‘ㅄ’계, ‘ㅅ’계, ‘ㅂ’계의 구별이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17세기에 어두 자음군이 된소리가 된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완성은 17세기 중엽에 이뤄진다. ‘ㅎ’의 된소리가 있었고, 이 된소리의 원인은 15세기 ‘ᅘᅥ-’ 17세기 ‘ᄻᅥ-’ 표기 단어는 하나로 기능 부담량이 적어 『노걸대언해』 ‘켜-’로 표기된 예가 있어 17세기 후반 ‘ㅋ’에 합류했다고 본다. 15, 16세기에 많이 나타난 평음 된소리화는 근대에 들어 더욱 일반화되었다. 모음 ‘ㆍ’의 소실은 2번에 걸쳐 소멸한다. 처음은 16세기에 제1단계의 소실을 겪고, 18세기 후반에 와서 제2단계 소실이 일어나 완전 소멸하게 된다. 17세기 문헌 『동국신속삼강행실』에 그 ‘흙’과 ‘소매’가 여러 군데 보인다. 제1단계소실로 ‘ㆍ>ㅡ’, ‘ㆍ>ㅗ’를 보여준다. 이밖에도 몇 몇 문헌에서 ‘ㆍ’소실이 보이나 결정적이지 않았다. 18세기 중엽 제2단계소실은『한청문감』에서 ‘ㆍ>ㅏ’의 변화공식을 볼 수 있다.
이중모음의 단모음화는 ‘ㆍ’의 소실로 이중모음 ‘ㆎ’가 ‘ㅐ’로 변한 뒤 ‘ㅐ’와 ‘ㅔ’는 각각 [ɛ], [e]로 단모음화하였다. 단모음화가 일어난 증거로 움라우트 현상을 들 수 있다. 움라우트란 뒤 음절의 i동화로 앞 음절의 a가 ɛ로, ə가 e로 변화한 현상을 말한다. 이중모음 ‘ㅐ’, ‘ㅔ’의 단모음화는 18세기 말엽에 일어난 것으로 확인된다. 자음의 음운체계는 중세와 달리 근대에는 ‘ㅎ’의 된소리만 존재했고, 19세기 초엽에 모음 체계 ‘ㆍ’의 소실로 ‘ㅐ’, ‘ㅔ’ 단모음화를 거쳐 8모음 체계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구개음화는 ‘i, y’ 앞에서 ‘ㄷ, ㄸ, ㅌ’, ‘ㄱ, ㄲ, ㅋ’, ‘ㅈ, ㅉ, ㅊ’으로 변하는 형상을 말한다. 여러 문헌을 보아선 구개음화는 17세기와 18세기의 교체기에 일어난 것으로 확인된다. 18세기 후반에 나타난 ‘i, y'에 선행한 ‘ㄴ’의 탈락은 구개음화와 관련된 현상이다.
17세기 말엽 원순모음화가 이뤄진다. 원순모음화란 순음 ‘ㅁ, ㅂ, ㅍ, ㅽ’ 아래에서 모음 ‘ㅡ’가 원순모음 ‘ㅜ’로 바뀌는 현상을 말한다. 19세기 들어 ‘ , , ’아래에서 ‘ㅡ’가 ‘ㅣ’로 바뀌는 전설모음화가 일어난다. 예로 중세어의 ‘아ᄎᆞᆷ’은 16세기에 ‘아츰’이 되고, 19세기에 ‘아침’이 된다. 마지막으로 근대국어의 운운의 변화에 대한 모음조화는 다음과 같다. 16세기 ‘ㆍ’가 비어두 음절에서 ‘ㅡ’로 변한 사실은 근대국의 모음조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ㅡ’는 부분적 중립성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 ‘ㅡ’의 부분 중립화는 결정적으로 국어 모음조화의 붕괴를 가져왔다. 18세기 ‘ㆍ’가 ‘ㅣ’로 변했으나 두 모음이 양모음이어서 중립화 가져오지 않았다. 종래 ‘ㅏ’는 ‘ㅓ’대립과, ‘ㅡ’와 대립을 가지면서‘ㅗ>ㅜ’ 경향이 추가되어 근대 모음조화 어간, 어미 막론하고 큰 타격을 입는다.
5-2) 근대 국어의 문법 변화
16세기 언어 변화의 결과 17세기 근대국어 모습은 크게 다른 모습을 보인다. 18세기는 정도가 가속화되어 19세기에는 거의 현대어와 흡사하게 이른다. 중세국어에 비해 근대국어는 간소화된 측면이 있으며 그것은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측면을 부각한다. 16세기 문어의 낡은 체계에 혁신을 불어넣어 근대어의 과도기를 거쳐 새롭게 나아간다. 다음은 근대 국어의 문법 변화에 대한 조어법, 곡용, 특수조사, 활용, 첨사, 문장구조에 대한 설명이다.
조어법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면서 생산성이 없어 사라진 것이 있다. 중세어에서 지적되었던 용언 어간의 유리적 성격이 근대어에 와서 없어졌다. 동사에서 명사를 파생시키는 어미로 ‘-(으)ㅁ’는 여전히 근대에도 대표적이다. 주의할 점은 동명사가 그대로 파생명사였던 ‘우룸’, ‘우ᅀᅮᆷ’ 등이 ‘우름’, ‘우음’이 되었다. 접미사 ‘-이’는 아주 비생산적이라 중세어 ‘맛조이’ 등이 화석화 되었다. 사동 어간을 파생시키는 접미사는 ‘-히-’, ‘-우-’가 남고 나머지는 사라졌다. 15세기 ‘ᄒᆞ-’의 사동형이 ‘ᄒᆡ-'였는데, 16세기 ’ᄒᆞ이-‘로 이 표기가 17세기에 계승되었다. 명사로부터 형용사를 파생시키는 접미사는 중세어에서 ‘-ᄅᆞᆲ/ᄅᆞᄫᆡ-’, ‘-ᄃᆞᇦ/ᄃᆞᄫᆡ-’ 등의 교체형을 가졌는데, 근대에는 ‘-롭-’, ‘-되-’로 변하였다. ‘-스럽-’의 출현되었다. 동사에서 형용사를 파생시키는 ‘-ㅸ-’ ‘-ᄇᆞ/브-’에 따른 파생법은 근대어에서 생산성을 잃었다. 동사의 부동사형과 ‘ᄒᆞ-’의 합성어가 생산성을 가지게 되었다.
곡용은 ‘ㅎ’ 말음 명사들은 중세에서 근대 전기까지 유지되다가 후기에 탈락된다. 체언의 비자동적 교체를 지향하고 단일화를 성취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격조사에서 일정한 환경에만 나타나는 주격의 ‘-가’인데, 17세기가 발달의 초기임을 말해주시고 있다. 근대어에 와서 ‘-의’만이 속격의 기능을 나타나게 된다. 중세어에서 ‘-ㅅ’은 근대국어에서 문자 그대로의 ‘사이시옷’이 된다. 대명사에서는 1인칭과 2인칭의 주격형 ‘내가’, ‘네가’가 사용되고, 이것은 중세의 주격형에 다시 ‘-가-가 연결된 것이다. 17세기에 사물대명사 미지칭은 ‘므엇’과 ‘므섯’이 공존하다 18세기에 ‘무엇’으로 단일화되었다. ‘어느’는 근대어에서 대명사로서 용법을 잃어 곡용을 하지 않게 되었다. 특수 조사는 근대에 와서 상당히 간소화 되었고, 여격 표시의 조사는 평칭의 ‘의게’, 존칭의 ‘ᄭᅦ’로 통일되었다. 이 ‘ᄭᅦ’와 후치사 ‘셔’의 결합 ‘ᄭᅦ셔’가 근대어에서 존칭의 주격을 표시하게 된 것은 특기할 만하다. 현대어의 ‘께서’는 근대어 ‘ᄭᅦ셔’의 계통을 끄는 것을 생각된다. 비교를 나타낸 특수조사로는 중세의 ‘두고, 두곤’에서 변한 ‘도곤’이 있다. 18세기에 생긴 ‘보다가’가 ‘도곤’을 물리치고 19세기 후반에 유일형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근대국어의 활용 변화는 다음과 같다. 활용어간, 선어말 어미, 어말 어미, 부동사 어미, 정동사 어미의 변화가 있다. 우선 활용어간 ‘ㅸ’, ‘ㅿ’이 근대국어에 없어서 중세어에 이들 말음을 가졌던 어간에 변화가 있어나 ‘ㅸ’은 w가 ‘ㅿ’은 탈락된다. 어간 말은 ‘ㅺ’은 ‘ㄲ’이 되고, ‘ㅼ’을 어간 말음으로 가졌던 ‘마ᇨ-’은 ‘맡-’으로 변한다. 선어말 어미 변화는 중세어에 있던 의도법은 자취없이 사라졌고 경어법은 존경법과 공손법의 체계로 이행되었고, 겸양법은 공손법으로 변한다. 중세어의 시상 체계는 심각한 동요를 보이기 시작하고, 감동법 선어말 어미 ‘도’만 남았다. 어말 어미 변화는 동명사 어미, 부동사 어미, 정동사 어미 변화가 있다. 그중 정동사 어미는 명령법은 ‘-아쎠-가 없어지고 ’-소-가 등장, 의문법은 판정의문, 설명의문 구별이 점차 사라졌고, 감탄법은 16세기에 나타난 ‘-고나’의 일반화가 이루어 졌다. 첨사는 근대어에서 ‘야’, ‘곳’을 들 수 있다. 중세국어의 잡다한 강세첨사는 사라지고 ‘ㅇ’은 ‘-명’에만 보이는데 ‘오명 가명’에 화석화되어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근대 문장구조는 중세어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복자한 구조를 가진다. 중세어의 형식명사 ‘ᄃᆞ’와 ‘ㅅ’를 인정히기 어렵게 되었고, ‘-기’ 동명사가 크게 세력을 떨치고 ‘-(으)ㅁ’은 크게 위축된다. ‘-ㄴ, -ㄹ' 동명사는 수식어적 용법만ㅇ르 가지게 된다. 근대어의 문장들은 도사문이 되어가는 경향이 뚜렷이 보여준다. 근대 소설을 보면 단문은 드물고 복합문과 합성문이 많다. 단순화된 것은 현대에 와서다.
우리말의 역사를 통해 현대어를 보는 새로운 시각
고대에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말의 표기 방법을 염두에 두고 국어사를 살폈다.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는 우리말을 한자라는 문자표기에 적합하게 사용할까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고, 훈민정음 창제 후에는 음운과 문법의 체계에서 효용성의 측면을 고려해 더욱 우리말을 잘 표현하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변화를 거듭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말의 역사를 통해 현대어를 보는 새로운 시각이 생겨났다. 우리말을 잘 표현하고 표기하기 위해 선조들의 노력이 눈물겹다. 그렇게 국어와 한글의 생명력을 다시금 되새김질 할 수 있었다. 우리말의 가치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해서 한 말이지만, 한순간에 잃게 될 수도 있고, 아끼지 못해 소멸될 수도 있다. 평범했던 국어가 다시 만날 수 없는 사이처럼 애틋하고 자랑스럽다. 더욱 올바르게 국어의 쓰임이 발전되길 바란다.
*참고문헌
이기문, 이호권, 국어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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